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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r-mana.com/Interview/DetailView/252



김달은 이 악마적인 인터뷰로 일약 웹툰계의 유명한 빌런이 되었다. 비평가와 작가의 끈끈한 커넥션 속에 독자만 바보로 만들었다는 둥, 페미니즘적 작품을 그려놓고도 페미니스트를 무시했다는 둥, <여자 제갈량>을 기다리는 독자들을 기만했다는 둥. 특히 <여자 제갈량>의 초기 연재처였던 ㄹㄹ웹, 그리고 그의 서사를 페미니즘적으로 읽어내려갔던 무수한 페미니스트들이 일제히, 그리고 분연히 김달을 향해 궐기했다. 결국 김달은 완결된지 한참이나 지난 <여자제갈량>의 연재 리스트에 불명예스러운 사과문을 덧붙여야만 했다. [참조 : https://www.lezhin.com/ko/comic/girlgongmyung/n2]


김달의 잘못을 두둔할 필요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작품'을 그려내는 '작가'로서의 책임은 작품을 그려내는 데만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김달의 발언들은 작품-작가의 연결고리 외의 것에 대해서는 무책임하고 경솔했다. 그럼에도 한참 지나간 떡밥을 꺼내들어 몇 자 적어보는 이유는, 다만 그의 작품을 애독한 독자로서 이 문제의 인터뷰의 행간을 조금이나마 다시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터뷰 전체를 몇 번이고 정독해봐도, 김달의 이야기 가장 진실된 이야기는 이것이다. "결국 내가 말하는 건 전부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대목에서 김달은 이 인터뷰 전체를 거대한 거짓말쟁이의 역설(Liar Paradox)에 빠뜨려버렸다.[출처 : http://www.your-mana.com/Interview/DetailView/252]



아, 한가지 더 있다면 이 대목이 아닐까 싶다.


[출처 : http://www.your-mana.com/Interview/DetailView/252]


<여자 제갈량>의 거의 모든 여성은 실패한다. 왕좌지재의 순욱은 주군을 모시는 운명에 만족해야 하고, 곽가는 다만 '대여한 권세'를 누리는 것에 만족할 따름이다. <환관제조일기>에서도, 오룡은 도박장에서 칼에 찔리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 꿈꾸는 것은 허무하고, 생의 끝에는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는다. 다만 남는 것은 뜯어지고 이어붙여진 기록, 그것도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기록들 뿐이다.



그러니 그가 만화를 통해 기록한 처절한 '실패'들은 그 자신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특히 <여자 제갈량>의 곽가야 말로 작가 그 자신의 페르소나다. 레즈비언, 여성, 그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실패'의 끝에서 만나는 가장 큰 승리로서의 죽음. 인터뷰를 한 번 읽은 후 다시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내려가다보면, "곽가에게 동질감 못 느껴요."라는 그의 말은 "말하는 게 전부 거짓말"이라던 그의 말과 묘하게 겹쳐진다. 결국 우리는 거짓말로 점철된 이 인터뷰들 속에서 곽가의 말들을 발견하게 된다. 


<여자 제갈량> 58화. "본인은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 길게 살 인생 아닌데, 내가 그렇게 재미없게 살아야 하나? 그 길은 너무나 재미없고, 고된 가시밭길입니다. 가기 싫어."라는 말에서 이 장면을 떠올렸다면 무리일까?


이 외에도 인터뷰 속에서 곽가의, 공명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 뿐만 아니다. 사실 이 인터뷰가 거짓말로 점철된 인터뷰라는 사실은 2년 전의 인터뷰를 찾아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2015년에 진행된 중앙일보에서의 인터뷰에서 그는 스스로의 스스로의 감정을 쿨함으로 포장하는 대신 여과없이 드러낸다. 우울하고 감상적인 정서가 이입되었음을 시인하고, "일상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담아내었음을 말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는 말은 "대충 삼국지랑 여캐가 팔리길래 그렸다."던 유어마나의 인터뷰와는 완전히 충돌한다. 심지어 그는 페미니즘 서사와는 거리가 멀다던 유어마나에서의 인터뷰와는 달리, 2년 전의 인터뷰에서는 "페미니즘을 연구하며 연재를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니 두 인터뷰 중 하나는 완전히 거짓말이 되는 셈이다. [참조: http://news.joins.com/article/19095766]


어느쪽의 김달이 진짜 김달일까. 만일 2017년의 김달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 거짓말들은 어디로부터 연원한 것일까. 2015년의 그는 수줍지만 즐거워 보인다. 자신의 이야기를 재잘거릴 줄 아는 작가였다. 그러나 2017년의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독자를, 작품을 냉소한다. 모 매체의 매체비평처럼 "무슨 사상을 검증하듯 인터뷰를 진행'했던 인터뷰어의 태도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참조 : https://www.webtoonguide.com/board/jampuri/2581] 그보다는 그가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김달 자신은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김달은 곽가를 통해 너무 많은 말을 쏟았다. 레즈비언으로서의 감정들, '여자'로서의 꿈, 그리고 허무. 곽가가 꿈꾸던 승리는 세상을 부숴버리는 것이었지만, 곽가가 거머쥘 수 있었던 가장 찬란한 승리는 죽음뿐이었다.


<여자 제갈량> 66화. 곽가의 죽음 직전, 곽가가 가후와의 기억을 떠올리던 장면의 마지막


나무위키의 <여자제갈량> 항목 중 비판에 관한 항목에서 지적하는 것 중 하나가 후반의 작붕이지만, [참조 : https://namu.wiki/w/%EC%97%AC%EC%9E%90%20%EC%A0%9C%EA%B0%88%EB%9F%89#s-2.2] 이 작붕을 단순히 작가의 역량 문제로 봐야할까? 아무리 심각한 장면에서도 종종 끼워넣어지던 개그신들이 곽가의 감정이 고조되면 고조될 수록 사라지기 시작한 건, 단순히 작가의 계산, 혹은 귀차니즘일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어쨌든 김달은 <여자제갈량>을 마무리짓고, <환관제조일기>를 연재한다. 여자제갈량보다 훨씬 더 활극에 가까운 작품. 오룡은 여성이지만, (일부이지만) 남성의 성을 빼앗는, 일종의 권위자로 군림한다. 곽가나 제갈량의 병약함이나 가후와 같은 컴플렉스 따위는 없으며, 심지어는 남성의 성에 대한 최종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여성'의 존재. 완벽하게 '판타지'적인 주인공이다. 결국 이입할 수 없는 주인공을 중심에 두고, 괴롭힘당하는 여성으로서의 구중궁궐 속 여성들을 배치함으로써 작품 속 약자들(환관들, 궁궐의 여인들)에 대한 사디즘적 가학을 저지른다.



그러나 완벽한 가학은 실패한다. 미스 그레이의 존재는 그렇기 때문에 크다. 궁궐과 도자장에서 저질러지는 수많은 가학의 현장 속에서 그레이는 연민한다. 그것이 자기 연민인지, 혹은 '여성' 그 자체에 대한 연민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김달은 이 부분에 대해 인터뷰에서 약간의 힌트를 남긴다.


[출처 : http://www.your-mana.com/Interview/DetailView/252]



이 대목에서 '미스 그레이'를 김달 자신으로 바꾸어도 별 위화감은 없다. 숱한 한계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여성이 수만의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여자제갈량>의 세계, 이를 넘어, 남성이 그토록 자랑하는 '자지'를 잘라내는 권한을 가진 여성 도자장의 세계까지. 레즈비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그 때문에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던 이 '현실'의 세계를 넘어서는 환상이 필요했던 건 바로 김달 자신이었던 것 아닐까.


<환관제조일기>의 완결, 그리고 약간의 공백 뒤에 김달은 단편집 <달의 상자>를 연재한다. 인터뷰로 한 차례 홍역을 겪은 이후 시작된 연재. 장편과 중편 연재를 끝낸 뒤의 단편은 어딘가 어수선하기도 했고, 종잡을 수 없기도 했다. 무얼 그려야 할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고, 혹은 그리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그리는 것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 연재를 위한 숨고르기일 수도, 혹은 인터뷰로 인한 어떤 감정의 문제들을 이겨나가는 방법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조금의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김달은 <여자제갈량>으로부터 <환관제조일기>에까지 이어지는 감정을 그려낸 후 많이 지쳐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터뷰에서 김달은 <환관제조일기>를 구상한 이유를 이렇게 표현한다. "피로해서."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피로였을까.


다시 문제의 인터뷰로 화제를 돌려보자. 이 인터뷰는 <환관제조일기>와 <달의 상자> 사이의 시기에 작성되었다. 인터뷰어는 끊임없이 김달에게 '페미니즘 작가'의 색채를 씌우기 위해 싸운다. <여자제갈량>의 유머코드를 '페미니즘적 코드를 차용'한 것으로 파악한다든가, <환관제조일기>가 페미니즘적 맥락으로 읽였기 때문에 잘 팔렸는지를 묻는다든가. (반대로 생각하면, 이는 '<환관제조일기>가 페미니즘적 코드를 담고 있는가'를 질문한 것과 마찬가지다.) 


인터뷰 전반의 맥락을 다 읽어낼 수는 없지만, 왜인지 김달은 작가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선언을 한 뒤에도 페미니즘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시작한다. 질문지를 인용해 "미스 그레이는 페미니즘 때문에 환상을 지키려 한 것이 아니다."라든가, 역사를 운동의 관점으로 보지 말아달라든가 하는. 페미니즘으로부터의 거리두기는 아래 대목에서 정점에 이른다.


[출처 : http://www.your-mana.com/Interview/DetailView/252]


2년 전의 인터뷰에서 "페미니스트로서 내 정치적 의견을 담은 만화를 단편으로 그리고싶다.(참조 : http://news.joins.com/article/19095766)"던 당찬 작가는 왜 이런 거리두기를 하고 있을까. 자신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봐주기보다는 페미니즘의 서사로 끊임없이 끌어오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로부터의 염증일 수도, 혹은 그런 태도의 인터뷰어에 대한 심술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여성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신이 삶이 부딪치는 어떤 한계, 그리고 그 한계로 인한 자기연민, 그리고 도저히 벽을 뚫어낼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허무로 인해 지쳐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독심술을 쓸 수는 없으니 그의 심리를 분석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혹은 네가 뭔데 궁예질이라는 훈계 섞인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 물론 이 글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많지만, 그럼에도 구구절절이 글을 얽어낸 것은 다만 비난으로 점철된 이 인터뷰에 대한 반응들을 조금 걷어내고, 이 인터뷰의 행간을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유어마나의 인터뷰는 인터뷰의 방향성도, 편집도 불친절했고, 그로 인해 작가 그 자신의 '진심'을 읽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인터뷰는 김달이라는 작가 그 자신과 작품을 연결해주는 어떤 의미를 담아주고 있었고, 이 글은 그 의미들을 더듬더듬 읽어내려가 보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김달의 후속작이었던 <달의 상자> 역시 끝났다. 김달은 이 일련의 이야기들 속에서 불분명하고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많이 내놓았지만 여전히 '여성'을 그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때 그가 페미니스트였던 것보다, 혹은 지금도 페미니스트인지의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연민이, 혹은 환상이 엮어내는 강력한 '공감'이야 말로 그의 가장 큰 무기니까. 그가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페미니즘의 본질은 '공감'이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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